모명재(慕明齋)와 두사충(杜師忠)장군

2018. 5. 11. 17:28살아가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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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앞길로 무수히 지나다녔으나 모명재(慕明齋)를 알게 된 것은 고산 서당(孤山 書堂) 때문이었다. 고산 서당이 명당이라고 하였고, 이 명당과 관련된 전설에 두사충(杜師忠) 장군이 있었으며, 그를 추모하는 사당이 모명재(慕明齋)였기에 오늘 일부러 시간을 내서 이곳에 들렀다.

 

 

 

 

 

내 기억으로는 파란색을 바탕으로 한 현판을 본 적이 없기에 약간 낯설다는 느낌이 든다. 두사충(杜師忠) 장군이 명나라에서 귀화한 장수였기에 중국식으로 현판을 단 것인지도 모르겠다. 대문의 만동문(萬東門)은 ‘백천유수 필지동(百川流水必之東)’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모든 하천은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말로 ‘그 근본을 잊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한다.

 

 

 

 

 

 

 

 

대구광역시 수성구 달구벌대로 525길 14-21(만촌동 715-1)에 세워져 있는 모명재(慕明齋)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로서 우리나라에 원군으로 왔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에 그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것으로 그의 호인 '그리워할 모(慕)', '명나라 이름 명(明)'자를 써서 '명나라를 그리워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두사충은 정유재란 때는 두 아들과 함께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된 뒤 귀화한 후 현재의 경상감영공원 일대에서 살다가 계산동으로 옮겼으나, 중국에 두고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 밑으로 주거지를 다시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에서 동네이름을 대명동이라 하였다. 그리고 단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을 향해 절을 올렸다 한다. 자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 기슭에다 그의 묘소를 마련했다. 모명재 앞뜰에 있는 신도비의 비문은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이인수가 지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가까운 사이가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모명재는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가지고 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건물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모명재는 네모반듯한 대지 위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모명재가 앞쪽에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으로 지어졌으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이고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퇴칸을 두고 있다. 부속 건물로 명정각(命旌閣)이 있는데 이 명정각은 두사충의 7대손인 두한필의 효행을 알리기 위해 세운 효자각이다. 두한필은 순조 23년(1823)에 태어나 고종 30년(1893)에 생을 마감하였는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런 효행을 알리기 위해 지어진 건물이 명정각이라고 한다.

[출처 : http://mmj.suseong.kr/]

 

 

 

 

 

두사충(杜師忠)은 명을 그리워하여 호를 ‘모명’이라 바꿨고, 杜陵 의 시조인 그를 모시기 위해 후손들이 이곳 ‘모명재’를 건축했다고 한다.

 

 

 

 

 

만동문을 들어서면서 오른쪽으로 커다란 공덕비가 보이는데 이 공덕비는 두사충 장군의 후손인 성공한 재일동포에 의해 건립된 것을 기리고 있다.


왼쪽 거북 좌대 위에 있는 신도비는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도수군통제사 이인수가 지어준 비석이라고 하는데 사진으로 보아 비석의 받침돌인 '귀부(龜趺)'와  비석의 머리인 '이수(螭首)'는 오래된 것으로 보이나 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인 '비신(碑身)' 은 새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다양한 편액이 걸려있었는데

 

 

 

 

 

 ‘형봉재(兄峰齋)’는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에 묘를 썼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하며,

 

 

 

 

 

 왼쪽 방 위의 편액인 ‘경모당(敬慕堂)’은 후손들이 두사충(모명)을 공경한다는 뜻이 담겨있고,

 

 

 

 

 

오른쪽 방의 ‘숭정유루(崇禎遺樓)’는 숭정이 남긴 누각이라는 뜻이 담겨 있고, 여기서 ‘숭정(崇禎)’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를 말한다고 한다.

 

 

 

 

 

‘이락헌(二樂軒)’에서 ‘이락(二樂)’은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 가운데 두 번째 즐거움에 해당하는 것으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락헌’은 하늘과 땅에 한 점 부끄럼이 없는 당당한 삶을 누리는 집이란 뜻이란다.

 

 

 

 

 

거연천석(居然泉石)은 자연에서 편안하게 사는 모습을 의미한다.

 

 

 

 

 

 

 

 

 

 

 

 

무덤에서나 보이는 문인석이 모명재 좌우에 서 있는 것이 특이하다.

 

 

 

 

 

 

 

 

 

무릇 옛사람이 유명해지려면 후손이 재력이 있거나 권력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두사충의 후손 가운데 재일동포로 신동양흥업주식회사를 세웠던 '유병선'이라는 이가 이 모명재를 중수하고, 묘역을 정비하는 데 소요된 경비와 땅 2788평을 희사한 것을 이를 후대에 잊지 않고자 이 공덕비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믿거나 말거나 하는 얘기지만, 이순신 장군은 후손이 잘되어 있었고, 마침 박정희라는 인물이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충효' 사상에서 충(忠)의 귀감을 찾다가 이순신을 세웠는데 임진왜란 때 그와 비견되는 戰功을 세운 육군의 정기룡 장군은 걸출한 후손이 없어서 빛을 보지 못했다는 속설이 있었다. 고로 이순신 장군은 자신의 戰功에 비해 과대하게 알려졌다는 의미다.

 

 

 

 

 

 

 

 

 

모명재 뒤뜰의 팽나무는 수명을 다했다. 살아서 천 년을 지켜야 하는데

 

 

 

 

중국 명나라 두릉(杜陵) 사람, 두사충(杜師忠).


두사충은 시성(詩聖) 두보의 후손으로 1592년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조선에 원군 온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였습니다. 지세를 살펴 진지를 삼을 만한 좋은 터를 잡는 일이 그의 임무로 그는 명나라 최고의 풍수지리가였어요. 명나라 최고의 풍수지리가가 왜 한국의 역사가 되어 한국인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을까요? 역사 속 두사충과 조우하며 모명재길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어볼까요!

 

명풍수(名風水), 조선에 오다

때는 1592년 임진년, 한양 봉수대에 연기가 활활 피어올랐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임진왜란 발발.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왜군의 공격으로 위기에 빠진 조선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명나라 장군 이여송은 그의 일급 참모이자 풍수전략가인 두사충과 함께 조선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1593년, 조선의 관군과 의병, 이여송과 두사충이 이끄는 명나라 연합군은 왜군을 격파하며 평양성을 탈환하였습니다. 그러나 승전의 기쁨도 잠시, 벽제관(경기도 고양시) 전투에서 왜군에 대파당하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어요. 패전의 모든 책임이 진지의 위치를 잡는 임무를 맡은 두사충에게 돌아갔습니다.
“두사충을 참수하라!”
그러나 참패의 원인이 진지의 위치가 아니라 병사들의 사기 문제였다는 우의정 정탁(鄭琢, 1526~1605) 등 조선 대신들의 구명운동으로 두사충은 간신히 그 책임을 모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선에서 다시 태어난 두사충. 전쟁이 끝나고 명나라로 돌아가는 길, 알 수 없는 기분이 두사충을 감싸 안았고 그는 조선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습니다.

 

두사충, 대구에 뿌리를 내리다

1598년,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고 7년간의 전쟁도 끝이 났습니다. 일본의 침략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조선을 보면서 두사충은 직감할 수 있었어요. 바람 앞의 등불은 ‘조선’이 아닌 바로 ‘명나라’라는 것을. 명(明)이 기울고 청(靑)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두사충은 청의 신하가 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조선 사람이 될지언정 오랑캐 백성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두사충은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귀화합니다. 그리고 대구 땅에 터를 잡게 되지요. 그는 조선의 수도 한양을 두고 왜 대구에 정착을 했을까요?
조선 조정에서는 귀화한 두사충을 극진히 대우하며 그가 원하는 곳에 살게 해 주었습니다. 두 번의 전쟁에 모두 출전하여 공을 세운 명나라 최고의 풍수지리가가 조선에서 살겠다하니 그럴 만도 했지요. 조선의 산세와 지세를 훤히 꿰뚫고 있던 두사충은 오래 전부터 대구를 마음에 둔 터였어요. 그가 대구에서 처음 정착한 곳은 지금의 경상감영공원자리입니다. 그자리는 ‘하루에 천냥이 나오는 명당’으로 오늘날 대구의 상업중심지가 되었으니 그의 풍수가 신통방통하게 들어맞은 셈이지요.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이 경상감영(경상도를 관할하던 관청) 부지로 결정되자 두사충은 나라를 위해 그 땅을 흔쾌히 내어 놓습니다.

그의 갸륵한 마음에 감동한 조정은 지금의 계산동 땅을 하사하였으나 이 땅마저도 추위에 떠는 백성들의 의복을 해결하기 위해 뽕나무를 심고 가꾸게 했습니다. 계산동 일대를 뽕나무 골목으로 불리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지요. 경상감영공원, 계산동 뽕나무 골목 이외에도 두사충은 대구 곳곳의 역사와 이야기가 되어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국 명나라를 그리워하며

두사충이 대구에 자리를 잡은 지도 어느덧 수십 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두사충 마음에 늘 자리하고 있었지요. 그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칠 때면 대덕산(앞산)을 올랐습니다. 산에 올라 고향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면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리움이 한없이 메아리치자 두사충은 아예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겨와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붙이고, 제단을 쌓아 매달 초하루 관복을 입고 황제가 살던 북쪽을 향하여 배례를 올렸습니다. 또한 호를 ‘명을 그리워한다’는 뜻에서 ‘모명(慕明)’으로 바꾸었어요. 두사충이 배례를 올렸던 대덕산 일대는 현재까지 ‘대명동(大明洞)’이라 불리며, 대명동은 11동까지 있는 대구에서 면적이 가장 큰 동이 되었습니다. 평생 풍수를 연구한 두사충의 안목이 느껴지는 부분이지요.
그는 명나라 최고의 풍수지리가답게 조선 팔도를 유람하며 풍수이론을 갈고 다듬은 ‘모명유결(慕明遺訣)’이란 풍수서를 펴냈습니다. 지금도 이 책은 풍수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교과서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흙이 되어

어느덧 죽음을 예감한 두사충. 그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묘터를 스스로 점지해둔 터였습니다.
그가 미리 보아둔 대구 최고의 명당은 어디일까요?
그러나 자신이 누울 자리를 찾아서 형제봉 앞을 지나던 중 그만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 바람에 두사충이 묻히고자 했던 자리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게 되었지요. 그 자리가 지금의 고산지역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쨌든 그의 묘는 모명재 뒤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의 후손인 두릉두씨(杜陵杜氏) 역시 지금까지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출처 : http://mmj.suseong.kr/story/0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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