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부원군 조원길(玉川 府院君 趙元吉)의 묘 및 묘표

2018. 7. 22. 23:19여행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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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손이 2~5년 간격으로 88 고속도로(광주-대구 고속도로)를 타고 광주와 전남 함평 학다리를 다니는데 전북 남원을 지나 신나게 달려서 순창에 거의 다다라 고추장 냄새가 진동할 무렵 크게 오른쪽으로 휘어 나가는데 오른쪽에 순간적으로 뭔가 위세가 대단한 재실처럼 보이는 것하고, 커다란 봉분을 지닌 유택(幽宅)이 보여서 마음은 차를 세우자고 하나 이미 2~300m 훌쩍지나쳐 버려 돌아올 때 보자고 다짐했으나 그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무작정 왼쪽을 보았으나 그것도 용이하지 않던 차에 오늘 고속으로 달리는 차 창 너머 반가운 풍경이 보인다. 오늘은 어떻게든 보리라 마음먹고, 위험하지만 차량을 후진시켜서 누군가의 묘지가 보이는 고속도로 갓길에 시동을 켠 채로 비상깜빡이를 넣어두고, 가드레일을 넘고, 가파른 언덕을 내려가서 그곳에 접근한다.

 

 

 

 

고속도로에서 보니 왼쪽에 제법 오래되고 웅장한 무덤이 있다.

 

 

 

 

재실로 보이는 솟을대문이 있는 집은 나중에 내려오면서 보고자 하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으니

 

 

 

 

오른쪽으로 담장을 두르고 작은 문이 있는 곳에 비석이 있었는데 고운 이의 유택에 마음을 둔 탓에 그만 안으로 들어가 보는 것을 잊었다. 아마도 왼쪽 산에 잠들어 있는 사람의 행장을 기록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비석 옆에는 최근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오석에 위에는 '옥천부원군충헌(玉川 府院君 獻) 공(公) 묘(墓)와 비(碑)' 라고 되어있고, 아래는 문화재지정기념비라고 쓰여 있다.  

 

 

 

 

 

두산백과에서는 옥천(玉川) 조씨의 중시조인 조원길()을 이렇게 설명했다.

 

조원길()은 고려 말의 문신으로 본관 옥천(: 순창의 옛 지명), 자는 성중(), 호는 농은()이다. 1369(공민왕 18)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교, 시중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정몽주·설장수와 함께 공양왕을 왕으로 받든 공으로 1등공신이 되고 옥천부원군에 봉해졌다. 고려가 망한 뒤 조선에 벼슬하지 않고 절의를 지켜 이색 등과 함께 5()으로 불렸다.

묘는 이건곡마을에 옥천조씨 시조의 설단()과 함께 있다. 조원길과 옥천군부인 조씨를 함께 장사한 봉토분으로 묘역의 형태와 배치가 고려시대의 능묘와 매우 유사하다. 풍수학에서는 []명당으로 불리고 있다. 묘비는 1391년 조원길 예장 당시 아들 조유가 세운 것으로, 발견 당시 묘 앞 축대 둘레석으로 놓여 있었다. 비석의 규모는 길이 2m,  50cm, 두께 30cm 정도이다묘표 윗부분에만 문자가 새겨져 있어 비대석이나 가첨석 없이 비신석만 땅 속에 절반쯤 묻어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마멸이 심해 비문을 식별하기 어려우나 정밀탁본을 통해 42자의 글씨를 밝혀냈다. 비문 내용은 1391(홍무 24) 신미 신축삭 삼십일 임오에 전공판서 조원길과 옥천군부인 조씨를 함께 장사한 묘이며, 효자(: 부모의 제사 때 자식을 가리키는 말) () 부정( : 고려의 관직) 조유() 찬서자로 되어 있다. 고려시대 묘역과 금석문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어 20051216일 전라북도기념물 제124호로 지정되었다. 옥천조씨대종회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혹자는 길손이 남의 분묘를 고온 이의 유택이라고 부르면서 보통사람들은 가까이 가기를 꺼리는 남의 무덤을 사진으로 남기고, 그곳을 찬찬히 둘러보면서 포스팅하는 것을 鬼神을 사랑하는 이로 오해할 수도 있겠으나 사실은 나는 귀신을 대단히 무서워한다.

 

요즘 어려운 세상살이를 하다 보니 오래전에 이 세상을 살다가 떠난 이가 어떤 것을 남기고, 어떤 말을 하였나? 그러면서 비록 한 번도 만난 적도 본 적도 없지만, 그들의 숨결을 지나가는 바람에게서 느끼기 위함이다.

 

특히 오늘의 위정자들은 이렇게 후세에 귀감이 되는 옛사람을 본받아 부디 역사에 오점을 남기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대체로 人間은 90년을 살아서 다른 이에게 욕을 배 터지게 얻어 먹으면서 세도를 부리고, 재물을 탐하다가 저 세상으로 간다면, 훗날 이런 유택과 비석처럼 유구하게 남아 길이길이 후세에 칭송을 받을 수가 있겠는가? 깊이 한 번 생각해 보길 권한다.

 

 

 

 

문화재 지정 기념비 뒤로 '옥천 부원군 조원길 묘 및 묘표'라고 안내판이 있는데 비각 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화강암 비석이 있다.

 

이 묘표는 1391년 조원길 예장 당시 아들 조유가 세운 것으로, 발견 당시 묘 앞 축대 둘레석으로 놓여 있었다. 비석의 규모는 길이 2m, 폭 50cm, 두께 30cm 정도이다. 묘표 윗부분에만 문자가 새겨져 있어 비대석이나 가첨석 없이 비신석만 땅 속에 절반쯤 묻어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마멸이 심해 비문을 식별하기 어려우나 정밀탁본을 통해 42자의 글씨를 밝혀냈다. 비문 내용은 ‘1391년(홍무 24) 신미 신축삭 삼십일 임오에 전공판서 조원길과 옥천군부인 조씨를 함께 장사한 묘이며, 효자(: 부모의 제사 때 자식을 가리키는 말) 전() 부정( : 고려의 관직) 조유() 찬서자’로 되어 있다. 고려시대 묘역과 금석문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어 2005년 12월 16일 전라북도기념물 제124호로 지정되었다. 옥천조씨대종회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고 두산백과에 있다.

 

 

 

 

향토문화전자 대전 등에서는 이 묘는 옥천 부원군 조원길과 그의 부인 조 씨를 함께 장사한 봉토분이라고 되어있다. 길손이 비석을 보니 군부인(郡夫人)이 두 분이다. 영광 김 씨하고, 복흥(復興) 조 씨라고 되어 있는 것 같은 데

 

 

 

 

새로운 비석에 상세히 나왔는데 위의 비석보다 한 분의 군부인이 늘었다. 군부인 부여 김 씨, 군부인 복흥 조 씨, 군부인 영광 김 씨 이렇게 세 명의 郡夫人과 함께 합장한 것일까?

 

 

 

 

묘역은 깨끗하게 벌초가 되어 있었다.

 

 

 

 

봉분 뒤에서 보니 광주-대구 고속도로가 지나간다. 오른쪽으로 광주 방향이다. 휴대폰 사진이 시원찮아서 주차된 차량이 보일 듯 말 듯 하네

 

 

 

 

묘소 앞에서 보니 왼쪽으로 재실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재실과 묘소를 관리하는 관리사가 보인다.

 

 

 

 

재실 뒤 오른쪽으로도 묘소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가지 않았다.

 

 

 

 

솟을 대문 안에는 옥천 조씨의 제사를 지내는 재실(齋室)인 지남재(芝南齋)가 있다.

 

 

 

 

재실과 관리사 사이의 담장에는 자두인지 옹애인지 한창 붉게 물들어가고 있다. 그 열매는 인간도 먹고, 귀신도 먹고

 

 

 

묘소를 내려오면서 왼쪽으로 펼쳐진 논 가운데 논과 어울리지 않는 석조물이 세워져 있다. 저게 뭔고??

 

 

 

 

오호라~ 현대판 표지석이다. '옥천 조씨 세( )산'이라고 되어 있는데 후손들이 차량을 타고 이곳을 지나다가 중시조의 영원한 안식처인 이곳을 알고, 고속도로에서 위험하지만, 길손처럼 차를 세우고 잠시 들어가서 참배를 하거나, 길손 같은 사람이 이곳을 지나다니다가 빨리 알아차리고 들어오라고 세운 것 같다.

 

이곳 순창 유등면 일대는 옥천(玉川) 趙 氏의 집성촌의 다른 이름인 세거지(世居地)가 분명할 것 같은데 세산(世山)의 와는 다른 글자인 것 같다. 어떤 글자인지 옥천 조씨 후손이 이 글을 보시면 댓글로 달아주시면 고맙겠다.

 

 

출처 : 수암의 풍수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