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국 밀직사 좌승지 贈 문하시중 '노영수(盧潁秀)'의 유택

2019. 1. 27. 22:18살아가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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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트막한 야산을 따라 올라가는데 무슨 공사를 하는지 긴 강철판으로 장벽을 세워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아마도 안에서는 어떤 공사를 하는지 그곳에 자라던 나무도 모두 뽑혀서 무슨 일인가 궁금하여 일부 무너진 소위 개구멍(?)으로 입장을 해서 작은 개활지를 지나니 굽은 소나무가 보호하는 커다란 무덤 2기가 나타난다.

 

 

 

 

무덤 주변의 소나무는 마치 경주 남산의 오릉 입구에 있는 굽은 소나무처럼 생겼다.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옛말이 틀림이 없다.

 

 

 

 

웅장한 무덤 2기가 아래와 위로 나란히 조성되었는데 위에 있는 무덤은 문인석은 있으나 비석이 없다. 저 앞에 보이는 비석은 아래에 있는 무덤 주인의 행장을 기록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렇다면 뒤에 있는 무덤의 주인은 앞에 있는 무덤 주인의 선친이나 조상이 아니겠는가? 위의 사진은 위에 있는 묘소의 모습이다. 비석은 없고 문인석과 상석만 놓여 있다.

 

 

 

 

무덤의 제일 뒤편에는 토지 지신이라는 작은 비석이 있고, 상석이 놓여 있다. 이런 것도 길손은 처음 본다. 아마도 토지 신에게도 제사를 지내 무덤을 보호해 달라는 의미로 보인다.

 

 

 

 

추운 날씨 때문에 집에 웅크리고 있다가 발길 닿는 대로 이곳에 우연히 왔다. 무덤의 크기는 거의 왕릉에 가까운 수준이다. 대체 무덤의 주인이 누구이기에 이렇게 거창한가? 그런데 안타깝게도 묘소 앞과 뒤편에는 붉은 금줄이 쳐져 있었다. 금줄을 했다고 귀신의 왕래를 막을 수도 없겠지만

 

 

 

 

 

고려국(高麗國) 정의대부(正議大夫) 밀직사(密直司) 좌승지(左承旨) 증(贈) 문하시중(門下侍中) 시의열교하(諡懿烈交河) 노공휘영수(公諱潁秀) 배(配) 정경부인(貞敬夫人) 평양 조씨(平壤 趙氏)로 비석에 쓰여져 있다. 그러니까 '노영수'라는 분이 이곳의 주인이 되겠다. 인터넷을 뒤지니 경산 문화 대사전에는 노영수라는 사람은 교하인으로 고려 충렬왕 때 과거에 올라 벼슬이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의열(懿烈)이다. 묘는 경산읍 중산동 서편에 있다.

 

 

 

 

묘소 앞으로는 불경스럽게도 붉은 노끈으로 길게 어떤 구역을 표시하는데 아마도 이 구역을 측량하고, 그 경계를 표시한 것으로 짐작된다.

 

 

 

 

'노영수'라는 분의 묘소 옆으로는 또 다른 작은 묘소가 조성되었는데 아마 아들이나 손자의 묘로 보인다.

 

 

 

 

묘소 아래로는 신도비로 보이는 또 다른 커다란 비석이 있었는데

 

 

 

 

밀직사 '盧潁秀'라는 분의 생전의 행장을 기록한 신도비가 묘소 오른쪽 앞에 서있다.

 

 

 

 

붉은색 노끈으로 금줄이 쳐진 아래로는 마치 시위를 하듯이 땅이 파헤쳐져 있었는데 아마도 묘소 주인의 후손과 개발업자 간의 작은 마찰이 예견된다.

 

 

 

 

개발업자의 소유로 추정되는 소나무는 빨갛고 파란 노끈으로 묶어놓았는데 베어낼 소나무를 표시한 것인지 아니면 무슨 심오한 뜻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길손의 생각으로는 노씨 문중과 개발업자가 협의해서 개발 실익이 없는 묘소 주변의 땅과 소나무를 존치해서 후손에게 불하가격으로 되파는 방법이 좋을 것으로 사료된다.

 

 

 

묘소의 오른쪽으로는 야산이 개발을 위해 중장비로 땅이 파헤쳐져 있다.

 

 

 

 

 

금줄이 쳐진 구역을 보니 참으로 애매하고, 안타깝게 되었다. 저런 형편으로는 묘소 주인의 후손도 개발업자도 서로 불편하기 짝이 없게 되었다. 그쪽으로 밀고 들어가 봐야 개발업자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땅인데 아마도 분묘 이장 공고를 하면서 압박을 하겠지

 

 

 

 

묘소를 나와서 묘소가 있는 소나무 숲을 보니 주변으로는 모두 아파트가 서있고

 

 

 

 

이곳을 개발하려고 땅을 파헤치니 선사시대의 무덤이 나왔는지 저렇게 발굴 중이다. 이곳 時至는 선사 시대의 무덤이 많이 있다. 위의 사람이 있는 사진은 다음날 다시 가서 찍은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