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17. 19:42ㆍ살아가는 이야기
고향 가는 길에 갑자기 일어난 격한 성냄을 이기고, 어지러운 마음을 달래보고자 선산 무을면 상송리의 천년고찰 수다사(水多寺)를 찾았다. 2019년 3월에 이곳을 보고 포스팅한 것이 생각나서 일주문 뒤에 있는 그 비석 앞에 다시 섰다.
비석에 손을 대고 오래전에 이미 작고한 얼굴도 모르는 '오봉선'이라는 효녀에게 큰 공감을 느끼는 마음을 전한다. 내 마음이 갑자기 숙연해지고 그녀의 갸륵한 마음이 내 손을 통해서 가슴으로 전해진다.
아래 내용은 2019년 3월 27일에 이 비석에 대해 포스팅한 내용이다.
[표탕(表碭) '처사 해주 오공, 유인 동래 정씨'로 되어 있는 것은 산소에 있는 비석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그 아래의 작은 글씨는 망자의 제삿날인 忌日을 표시한 것 같다.
표탕(表碭)이란 단어는 사전에 없지만, 나타낼 表(푯말과 같은 것) 무늬가 있는 돌 碭의 뜻을 내포하고 있어서 돌에 새긴 표지(標識)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오른쪽부터 풀어보니 '位畓 上松洞 三二八 三三六 畓 三百二十一坪 水多寺入'인데 위답(位畓)은 제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논으로 사찰에 제사를 맡기고 그 비용으로 수다사에 논 321평을 주었다는 뜻 같다.]
이 비석에 새겨진 내용도 2019년 3월 27일에 포스팅한 것을 이곳에 옮겼다. 이것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아 사찰 안에 들어가서 스님을 찾았지만, 스님은 휴식하신다고 만나주지 않아서 절에서 일하시는 보살님에게 부탁해서 꼭 스님이 시간이 있을 때 이 비석에 대한 내력을 설명해주시면 좋겠다고 하면서 전화번호를 휴대폰에 저장하였는데~ 연세가 많은 그 보살님은 이런 길손이 미덥지 못하여 절에 시주한 땅과 관계가 있는 사람이냐? 라고 하시면서 경계를 한다. 워낙 세상에 사기꾼이 많으니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그나저나 수다사에 주재하시는 스님도 일반인처럼 오봉선 이란 효녀의 효성이 어린 저 비석에 대한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시간이 조금 지나면 그 보살님에게 전화라도 해야겠다.
[이 비석을 언제 세웠는지는 모르겠으나 十四年 四月 住持 金奉律 監員(?) 또는 監院(?) 李永祚 女 吳奉善 外孫 朴石迕(14년 4월 주지 김봉율, 감원 이영조 여 오봉선, 외손 박석오) 대충 이렇게 되어있는데 14년이 서기 1914년인지 고종 14년인지 분간은 되지 않으나(사실은 1914년의 19라는 글자가 들어갈 부분이 고의적으로 쪼아낸 듯한 흔적이 있다.) 비석의 마모도로 보았을 때 얼추 100년 전에 세워진 비석인 것 같다. 길손은 이 비석을 보고 이렇게 해석한다. 시집간 오봉선이란 여식은 외동딸이었는데 시집을 가서 남편과 함께 친정 부모의 제사를 지내다가 남편도 죽자 위답을 수다사에 주고 부모의 제사를 맡겼다. 그 비석은 위답의 귀퉁이에 자리한 바위 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도 사찰에서 제사를 지내주는지 궁금하다.]
오봉선이라는 효녀가 절에 시주한 땅은 비석 뒤에 있으면서 앞에 보이는 땅이 321평으로 기록된 위답인 것 같다.
밭{예전에는 논(畓)}에는 최근 경작한 흔적이 없다. 아마도 사찰에서는 불천위 제사처럼 무한정으로 모실 수가 없으니 진작 그 제사가 없어졌겠지만, 그 갸륵한 효심은 비석으로 남아 후세에 길이 전해진다.
아!! 애닯고도 애닯도다!!
'처사 해주 오공(海州 吳公)'과 그의 처인 '동래 정씨(東萊 鄭氏)'는 슬하에 제사를 지내줄 아들이 없어서 대가 끊기고, 그것을 안타까워한 출가한 여식 '오봉선'은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부모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수다사에 위답(位畓)하면서까지 부모를 저승에서도 외롭지 않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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