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하게 보이는 대마도

2013. 9. 6. 09:46살아가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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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적으로 본다면 날씨가 쾌청하면 바다 수평선 멀리 잘 보일 것 같은데 이외로

화창한 날은 해무가 생겨서 원거리를 보기가 어렵다. 지난 겨울부터 장승해안로를

운동 삼아 산책하면서 대마도를 본 기억이 몇 번 없다. 물론 어떤 때는 대마도를 신경 쓰지 않고 걸은 탓도 있지만, 거제도와 대마도가 가까워도 좀처럼 보기가 어려운 것이

대마도를 육안으로 조망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날씨가 잔뜩 찌푸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마도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나타난다.

 

 

 

 

거제도 앞 해상에 정박되어 있는 약 1만 톤 급의 복합화물선 뒤로 대마도의 모습이 보인다.

 

 

 

 

빤히 보이는 저곳은 조선의 해안선을 유린한 왜구들의 근거지요, 광복 후에는 대마도

'이즈하라'를 중심으로 한 특공대 밀수의 근거지로 우리와는 악연이 있는 곳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공업이 약체를 면하지 못하였을 때 일확천금을 꿈꾸는 밀수꾼들이

탱크엔진을 얹은 특공대 밀수선으로 세관의 추적을 피해 남해안으로 침투하는 루트를

개발하여 활용하고 있었다.

 

 

당시 특공대 밀수와 관련된 일화를 소개하면,

 

 


                           일본 이즈하라항에 접안돼 있는 특공대 밀수선.

 

 

 6·25전쟁이 끝나고 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을 무렵인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까지 남해안을 주름잡았던 조직적인 해상밀수를 ‘특공대밀수(特攻隊密輸)’라고 부른다. 흔히 특공대 하면 특수작전과 기습공격이 주된 임무로 특별한 훈련을 받은 기동성이 뛰어난 공격부대를 말한다. 영국의 코맨도, 미국의 레인저, 일본의 가미가제(新風) 특공대, 우리나라의 공수부대나 특공여단을 들 수 있다.

무슨 이유로 당시에는 이처럼 으스스한 특공대란 이름을 붙여가면서까지 밀수를 해야 했고 그들의 실체는 어땠기에 15년 동안이나 해상밀수의 대명사로 군림했을까.

한·일 간 분쟁의 씨앗이 되기도 했고 남해안 도시가 밀수경기에 따라 생활이 좌지우지됐는가 하면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세관에서는 기관단총을 쏘아대면서까지 밀수와 전쟁을 벌여야 했던 것도 이 특공대밀수 때문이었다.

결국 지난 1968년 12월 세관 간부와 밀수왕 간 담판에 의해 서서히 꼬리를 내리긴 했지만 그동안 드러난 이 밀수 특징을 통해 실체를 알아보는 것도 흥미가 있을 것 같다.

최고의 특공대밀수는 소형 쾌속선에 의한 해상밀수였다. 10t급 남짓한 소형 목선에 속력을 높이기 위해 탱크에서 나온 엔진이나 그레이마린(GM) 엔진을 설치, 30노트 이상을 달렸다. 초기 10노트 정도인 세관감시선이 밀수선을 잡으려면 감시선 엔진고장이 나야만 가능했다. 뒤에는 밀수선이 소형 어선으로 변모되기도 했다.

두번째는 대마도 이즈하라항을 거점으로 하는 대일 밀무역이었다. 이즈하라항은 조선시대부터 부산과 왜관무역을 해 온 대마도 남단의 가장 큰 항구도시로 이곳에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밀수왕들이 은거하며 밀무역기지를 조성했다.

세번째는 일본 정부기관에서 인정한 변칙무역이었다. 특히 일본 세관과 출입국관리소 등은 일본 법에 따라 합법성을 주장, 비호하기도 했다.

네번째는 선명과 선원명은 가명으로, 선박서류는 위조해 선박을 운항하는 것이었다. 밀수선에는 일본의 세관·해운국·검역소 등의 용지와 공인(公印) 등을 비치해 놓고 자유자재로 선원수첩, 선박증서, 출입항 관계서류 등을 위조하기도 했다.


다섯번째는 주로 야간을 틈타 밀수품을 남해안의 도서 또는 해안에 양륙하거나 공해상에서 분선이나 수중에 투하하는 방식을 이용했다. 특히 남해안에는 유·무인 도서가 많아 이런 지형지물을 최대한 활용했다.

여섯번째는 밀수조직이 집단적 조직체로, 때로는 폭력배와 권력기관이 개입돼 난폭하고 기동성이 뛰어났다는 점이다.

이처럼 악명이 높던 특공대밀수가 막을 내린 지도 숱한 세월이 흘렀다.

아직 이와 비슷한 기법으로 하는 해상밀무역을 특공대밀수라고는 하지만 그때와는 차이가 있다. 죽음을 무릅쓰고 대한해협을 넘나들던 특공대밀수 주역들이 이제는 야인으로 돌아가 피안의 언덕을 바라보고 있을 나이가 됐다.

출처 : 파이낸셜 뉴스

 

 

 

 

 

 

 

우리나라 두 번째로 큰 섬인 거제도는 본섬의 해안선 길이는  328km(836리)로 매우

길어서 과거에는 무장간첩과 간첩들의 침투장소로, 최근까지는 밀수꾼들에게 밀수품

분선하기가 가장 용이한 장소로 인식되어 많은 밀수품이 양륙 되었고, 적발도 많이 된 곳이다.

 

과거에는 활어(산 물고기)수출선이 일본을 왕래하였는데 선원들의 급료가 지급되지 않아도 선원들이 자진하여 승선하여 선주는 고정비용 지출 없이 선원을 고용하고, 선원들은 밀수하여 급료를 충당하였다.

 

이들 활어수출선과 냉동운반선에 의한 밀수가 증가 하자 관세청에서는 이곳 거제도

장승포 세관에 '남해안밀수감시 선단'을 조직하여 체계적으로 밀수를 적발하였고,

모든 대한민국으로 들어오는 활어수출선과 냉동운반선은 이곳 장승포항으로 입항하여

입항수속과 동시에 선박검색을 받은 후에 목적지로 향하게 조치하였었다.

 

아래는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1979년 5월 11일 경남 장승포항에서 열린 제2차 남해안밀수감시 선단 발단식 사열장면.

 

남해안을 무대로 전개된 해상밀수는 지난 1950∼1960년대 활개를 쳤던 특공대밀수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자 이어 등단한 것이 일본으로 활선어와 냉동농수산물 등을 수출하는 선박에 의한 밀수였다. 일명 활선어수출선과 냉동운반선에 의한 밀수로 1970년대를 주름잡았다.

특히 장어·돔·문어 등 활선어 수출은 외화획득을 이유로 당시 정부가 정책적으로 지원했다. 심지어 활어 및 선어의 선도유지를 위해 수출면장 없이도 바로 현지에서 일본으로 출항이 가능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 선박은 이 같은 정부의 지원을 악용, 돌아오면서 금괴·녹용·시계·전자제품·비로드(벨벳)·화장품 등을 싣고 들어왔다. 나갈 때 외화벌이 수출선으로 나갔던 배가 돌아올 때는 밀수선으로 둔갑했던 것. 이런 활선어수출선의 효율적인 밀수단속을 위해 만든 기구가 남해안밀수감시선단으로, 2차례에 걸쳐 활동했다.

제1차 남해안밀수감시선단은 1972년 6월 22일 마산세관 충무출장소에 본부를 두고 출발했다. 당시 충무(현재 통영)는 청정해역의 중심에 있는 어항으로 활어를 수출하는 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약 40∼50척의 활선어수출선이 수시로 일본을 드나들었는데 대부분 선원들은 월급이 없었다. 생계를 유지하려면 밀수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여건이었다. 그러다 보니 남해안 일대에는 바다를 건너 온 일제상품을 흔히 볼 수 있었고 심지어 학생들의 연필이나 지우개까지 밀수품을 사용할 정도였다.

전국 세관에서 27척의 감시선과 70여명의 직원이 차출, 동해안 포항에서부터 서해안 군산항과 남해안 제주항에 이르기까지 전 해역을 4개 구역으로 나눠 책임감시를 하다가 지난 1974년 해체됐다.

제2차 남해안감시선단은 1979년 5월 11일 마산세관 장승포출장소(현 장승포시의 거제세관)에 본부를 두고 활동했다. 부산·마산·여수·목포세관에서 차출된 정예감시선 9척과 감시요원 40여명이었다. 이들 감시요원은 숙소가 마련돼 있지 않아 출장소 옥상에 가건물로 된 임시숙소를 만들어 그곳에서 24시간 군대 내무반과 같은 합숙생활을 하면서 밀수와 전쟁을 벌였다.

그 당시 밀수기법도 예전의 특공대밀수 못지 않게 대범하고 조직적이었다. 주로 귀국 때 야음을 틈타 항로를 이탈해 가며 밀수품을 다른 선박에 옮겨 싣거나 무인도와 같은 섬에 양륙, 또는 바다 속에 투하하는 방식으로 밀수가 이뤄졌다. 이 같은 불법양륙 등을 단속하기 위해 입항지를 장승포·부산·목포·군산·제주·포항항으로 한정, 직항토록 함으로써 항로규제가 뒤따랐다. 특히 남해안 중심에 있는 매물도감시서와 장승포항 앞에 있는 지심도초소의 세관레이다기지는 365일 이들 입항선의 항로 이탈 방지를 위해 방범초소와 같은 존재로서 불을 밝혔다.


 


 

 

 

지금은 선원에 의한 밀수는 거의 종적을 감췄지만, 국외에서 들어오는 사회안전위해물품 불법반입과 밀수를 방지하기 위해 50톤급의 감시정 '뮐렌도르프'호가 거제도 앞바다를 지킨다.

 

 

* 뮐렌도르프독일의 大韓 제국의 외교고문. 할레 대학에서 동양어와 법률을 배우고, 청나라 주재 독일 영사관으로 근무, 1869년 청(淸)의 세관리(稅關吏)로 전직한 뒤

이홍장의 추천으로 한국의 통리아문(統理衙門)의 참의(參議)ㆍ협판(協辦 : 1882)을 역임, 외교ㆍ세관 업무를 보았다. 1883년 해관세(海關稅) 수납 업무를 일본 은행에 위탁시키고, 1884년 러시아 공사 베베르(C. Waeber)에게 협조, 한ㆍ로(韓露)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게 했고, 갑신정변(1884)에는 김옥균의 개화파와 반목하여 수구파를 도왔다. 한성조약(漢城條約) 체결 후, 특명 전권 대신 서상우(徐相雨)의 부대신(副大臣)으로 도일(渡日), 주일(駐日) 러시아 공사 스페이에르(Spayer)와 결탁, 러시아의 세력을 한국에 끌어 들였으므로 외무협판 재직 중(1885) 이홍장에 의해 해임되어 이한(離韓)했다. 한국의 역사와 만주어에 조예가 깊었고, 중국 닝보[寧波]에서 사망하였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