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4. 19. 19:37ㆍ살아가는 이야기
이곳은 상주시 청리면 소재지에서 약 2~3Km 떨어진 송어 양식장이다. 내륙에 사는 사람들은 바닷고기 회를 먹을 기회가 잘 없다. 그래서 가끔 송어나 향어회를 먹기 위해 이 식당을 들리는데 특별할 것도 없는 이 송어 양식장이 사실 대단한 물건들이 보관된 곳이다.
사진에 보이는 평범한 시골 건물이 전축같은 수집 마니아들이라면 탐낼 물건이 가득 들어있는 곳이다. 경비가 허술한 듯 보여도 주인의 허락 없이 외상이란 말 없이 살짝 가져가려는 시도하는 건 아주 어리석은 행동이다.
※ 이곳에는 도난을 방지 하기 위해 고성능 CCTV가 많이 설치 되어 있고, 주인의 허락없이 소장품이 들어있는 방에 함부로 들어가다가 부비트랩처럼 인계철선을 건드리면 엄청난 경고음과 함께 인근 경찰지구대에서 긴급출동하고, 그리고 지방 도로에는 방범 CCTV도 24시간 가동하고 있으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저 건물은 넓다란 식당 건물이다. 혹시 지나가는 일이 있으면 송어회를 맛보시길 권한다.
각종 전자제품 등 수집물품이 들어있는 건물 입구의 겉모습은 여느 고물상이나 다름없다.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하다.
오래된 포니 픽업의 모습도 보이고,
그는 소장품을 습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여름에는 이곳에 에어컨을 가동한다고 한다. 정성도 보통 정성이 아니다.
주인에게 외상이란 말 없이 가져가는 사람을 방지하기 위해 이곳에서 야간 불침번도 서시고, 밖에는 사나운 맹견들이 지키고 있다. 사실 갖는다는 것은 풍요롭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론 아주 성가실 것이다.
소장품을 애지중지 아끼는 그의 노력을 보니 80년대 말 언젠가 인간시대에서 봤던 태국의 방콕시장 '잠롱'이란 사람이 생각난다. 잠롱은 태국의 대표적인 청렴결백한 시장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다. 그는 예비역 소장으로 군인생활을 마감하고, 정치세계에 발을 디뎠던 사람인데 그는 애초에는 야심찬 군인이었다.
그의 꿈은 태국 육군참모총장이었으며, 예쁜 여자를 부인으로 맞아 부유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태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육군 행정대학원으로 유학까지 한 엘리트 군인이었다. 그의 꿈대로 그는 예쁜 아내를 얻었고, 탄탄한 출셋길을 걸어왔다. 그렇게 야심 찬 그가 갑자기 청백리가 된 계기는 고급전축과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 부유층 사이에서는 고급 전축을 갖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고급 주택가에 살던 잠롱도 역시 전축을 갖고 싶었고 드디어 그 전축을 사서 집에 들여놓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더운 태국이나 베트남 같은 나라에는 으레 그렇듯이 개인 주택의 방범이 허술하였던 것이다. 더우니까 방문을 여는 것은 당연지사이고, 도둑은 힘들이지 않고 물건을 훔칠 수 있는 여건이었던 것이다.
잠롱은 전축을 집에 갖다 놓은 이후로 며칠간 전축을 잃지 않으려고 잠을 설치면서 잘 지켰는데 그것도 한순간 피로에 지친 잠롱이 깊은 잠에 빠졌던 어느 날 밤에 그만 잠롱은 자신의 고급 전축을 도둑 맞았다. 잠롱은 며칠 상심하였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가운데서도 또 한 편으론 시원한 생각이 들었다. 전축을 지키려고 고생했던 일들이 생각나면서 오히려 시원섭섭했다고 할까?
그래서 그날 이후로 잠롱은 자신의 물건을 이웃에게 한가지씩 주었고 받는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이 아끼던 물건을 모두 주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단다. 그러면서 그는 더 큰 행복을 얻었으며, 그리하여 태국에서 존경받는 최고로 청빈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하찮은 구식 라디오이다. 그러나 이것이 금성사에서 최초로 생산한 라디오라고 한다.
이곳의 물품은 사연과 애환이 깃들지 않은 물품은 없다. 서울에서 살다 온 주인은 이것을 운송하느라고 고생도 많았을 것이다.
왼쪽 밑부분에 있는 갈색 브라운관으로 보이는 것은 미국에서 최초로 만들었던 텔레비전이라고 한다.
아주 긴 브라운관이 나무로 만든 케이스에 넣어져 있다.
외국산과 국산을 막론하고 정말 오래되고 정겨웠던 카세트들이 즐비하다.
길손은 이것을 보고 깊은 상념에 잠긴다. 도대체 이게 얼마 만에 보는 물건인가? 라디오도 없던 가난한 어린 시절에 그래도 사람들은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듣고 싶었다. 이것이 사업이라고 간파한 전파에 지식이 있던 사람이 소위 지역 라디오 중계소를 만든 것이다.
그 사람은 자신의 집에 단 기통 발동기로 전동기를 돌려서 전기를 생산하고, 부락과 부락 간에는 전봇대를 대용하는 기다란 나무를 세우고, 군대에서 유선병들이 사용하는 PP 선을 연결해서 라디오를 듣기를 희망하는 농가에 저 스피커를 마루 위에 사람 키 높이보다 높게 설치하여 지정된 시간 대에 중계 방송되는 세상소식을 들었었다. 가끔은 중계업자의 육성으로 면사무소에서 부탁하는 공지사항이나 전달사항도 방송했던 기억이 난다.
주로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새마을과 관련된 홍보방송이 대부분이었지만, 간혹 유행가도 나오니 마당에서 일하면서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방송 중계업자는 아마도 라디오 방송을 앰프로 증폭하고, 그것을 PP 선을 이용해 농가에 보급하였던 것이다. 청취료는 당시에 돈보다는 겉보리 서너 말로 1년치 대금을 치루었다.
나는 소위 베이비부머 세대다. 그 어렵고 배고팠던 시절에도 저렇게 하여 세상 소식을 들었던 것은 우리나라가 이 만큼이라도 잘 살 수 있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모두 알고 싶었던 욕구가 많았던 민족이다.
주인장은 내가 귀한 물건과 그렇지 않은(사실은 모두 귀하지만) 잘 구분하지 못하자 당연하다면서 왼쪽의 스피커도 상당한 것이라면서 설명해 주는데 그만 기억의 한계로 이곳에 옮기지는 못하겠다. 정말로 유감이다. 사진을 찍는 이 순간에도 전직 공무원 간부로 일했던 사람과 교수가 이곳을 방문하였다.
이것도 금성사에서 최초로 만들었던 텔레비전이라고 한다.
고물상처럼 아무렇게나 자전거도 그냥 넘길 물건이 아니다.
3~40리 먼 길 비포장길을 자전거로 통학했던 길손은 늘 좋은 자전거를 가진 사람이 부러웠다. 비록 중고 삼천리 자전거나 삼광자전거를 사용했던 길손은 일제 후지 자전거를 가진 사람이 그렇게 부러웠다. 쏘나타를 타는 사람이 일제 렉서스 타는 사람이 부러운 것처럼 말이다.
다른 자전거 위에 아무렇게나 얹혀진 어린이들이 탔던 빨간 세발자전거는 당시 최초로 생산되었던 것이란다.
중간에 갈색의 투박한 흙받이가 있는 자전거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지게 대신에 사용하라고 독려하여 만들었던 재건(?) 자전거라고 한다.
이 자전거를 보니 웃음이 난다.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잠시 쉬고 있을 때, 면 소재지에 있는 술도가에서 나무로 만든 한 말들이 술통을 막걸리 배달 짐 자전거 뒤 짐받이에 쇠갈고리에 여러 말을 달고. 힘겹게 이 동네 저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배달하면 득달같이 달려가서 몰래 막걸리를 사먹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한 말들이 술통은 사진보다는 작지만 비슷하게 만들어졌다. 술통 위에 어른 주먹이 들어갈 정도의 구멍에는 나무로 만든 큰 마개가 박혀 있었고, 배달꾼이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살짝 나무뚜껑을 열고 술을 살짝 맛보았던 생각이 난다. 아!!~ 지금은 돌아오지 못할 그때 그 시절이 때론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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