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0. 21. 21:52ㆍ살아가는 이야기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을~
넘어오던 그날 밤이 그리웁고나~'
내가 매일 출퇴근하는 길에는 고모령이 있다.
오히려 등잔 밑이 어두운 법!! 지금은 고인이 되신 가수 '현인' 님이 불렀던
"비가 내리는 고모령"의 무대, 그곳은 고모역과 망우공원에 자리 잡은 특급호텔
'인터불고" 사이에 난 조그만 언덕길이다.
우리가 흔히 고모라고 하면 아버지의 누이인 고모(姑母)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고모는 뒤돌아 볼 顧 어머니 母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머니가
뒤를 돌아보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면 왜 어무이가 뒤를 돌아보았을까? 내 나름대로 상상을 한다.(웃지 말도록~~ ^^)
1. 어무이가 아침 일찍 집에서 땔감으로 불을 때서 죽을 끓이다가(옛날에는 쌀이 귀했으므로)
아부지가 전날 농땡이를 부려서 나무가 앵꼬되었다. 하는 수 없이 어무이는 옆 산에 급히
나뭇가지를 주으러 가면서 혹시 부엌에 불이 나서 초가삼간 태울까 염려되어 뒤를 돌아보았다.
2. 어무이가 술주정뱅이 남편과 같이 살면서 어린 자식들 때문에 그넘 술주정과 행패를 참고,
또 참으며, 살려고 했는데 도저히 패악질을 더는 견딜 수가 없이 야반 도주하면서
어린 자식들이 걱정되어 뒤돌아 보았다.
3. 어제 저녁 먹은 것이 탈이 났나? 아랫배가 살살 아파와서 갑자기 통시(정낭, 뒷간)에 가려고
급한 걸음을 옮기는데 젖먹이가 어무이 사정도 모르고, 죽으라 하고 울어대서 어무이가
뒤돌아보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고모령에 대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두가지로 요약이 되는데
첫째는, 멀고 먼 옛날, 고모령 인근에 남편을 여읜 홀어머니와 오누이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 오누이는 힘이 장사였던 모양인데 둘 다 막상 막하여서 누이에게 지기 싫어한 시기심 많은
오빠가 누이에게 산 쌓기 내기를 하였고, 둘이 산을 쌓았는데, 오빠가 졌다.
누이에게 진 오빠는 분함을 참지 못하여 제가 쌓은 산에 큰 바위를 집어던져 산허리를 분질러
버렸다고 한다. 날이면 날마다 다투고 싸우는 오누이가 꼴 뵈기 싫은 어머니는 집을 나가게
되는데, 집을 떠나면서 집 쪽을 돌아 보았다는 전설로 '고모령'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고모령 인근에 실제 형제봉이 있다)
둘째는, 고모령 인근 마을에 두 형제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그들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왜놈 고등계 순사에게 잡혀서 대구 교도소에 갇혔다고 한다. 두 아들이 투옥되자, 홀어머니는 매일
이 고개를 넘어 교도소에 면회를 다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비가 몹시 내리는 날, 홀어머니는 고모령을 넘어오며, 형제가 갇혀 있는 대구 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데, 이 사연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이 고개를 고모령으로
불렀다고 한다.
대구시 수성구 만촌동에 소재한 망우공원 입구에 세워진 '비내리는 고모령' 노래碑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내 막내 동생 쯤되는 젊은이가 "고모령 碑" 뒤쪽 한 귀퉁이에 조그만 비석이 되어 있다. 가신 이에게는 애달픈 일이지만, 이 노래 碑를 면면히 기억해 줄 극적인 조연의 역할을 하고 있다.
1991년 9월 27일 그는 고모령에 대한 기사를 쓰려고, 고모역에서 사진촬영을 하다가 뒤에서 들이친 열차에 치여 요절하였다.
망우당 공원
이곳이 '고모역'이다. '고모'들이 타는 역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시길~~ ㅋㅋ~
고모역이 고모들만 탄다면, 이모들은 이모역, 할배들은 할배역, 할매들은 할매역, 양아치들은 양아치역을 만들어 달라고 할터인데 다행히도 이곳은 고모들이 타는 역이 아니어서 천만다행이다.^^
지금은 오가는 이가 없는지 철문이 굳게 닫혀 있다.
고모역 건너편에 있는 '고모상점'이다. 고모역이 있는 곳에 마침 약방의 감초처럼 상점이 있는데,
이렇게 구색이 맞아야 소설이라도 한편 나오는 게 아닐까? 그런데 저 상점 할매 주인이 누구의 고모인지 확인은 못 했는데, 시간이 나면 찾아가서 확인해야겠다.^^
고모상점의 야경
고모역에서 팔현마을 가기 전에 저 앞쪽으로 보이는 능선 나무 위에는 철새인 왜가리와 백로들이 서식하고 있다. 지금은 고향으로 모두 떠나고, 빈 둥지만 남아 있다.
좌측으로 경부선 철길이 지나가고, 멀리 팔현마을이 보인다.
팔현마을 전경
에게게~~!! 이게 뭐시람???? 이게 고모령이야? 무슨 령이 이렇게 생겼어? 우리집 뒷산 언덕보다 낮잖아~~ 적어도 령(嶺)이라고 하면 추풍령, 박달령, 대관령, 이화령, 한계령 같이 전설의 고향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주막이 있어야 하고, 중간에는 도적들이 산막을 짓고 고갯마루 넘어가는 길손을
털려고 하는 무시 무시한 곳인데~ 이거야 원!! 물구나무 서서도 넘어가겠다. 쩝~~
김범일 대구시장님!! 이 그림을 보시고 느끼시는 것 뭐 없능교?? 저 할매들 참말로 카나, 부로 카나?? 차 지나가는데 비킬데가 없지 않능교? 저 할매들 사고나면 누가 책임질랑교? 마!! 빨리 도로 넓히소, 야???????????~~~!!!!!!!!!!!! ?????????????????
고모령 갓길에 대봉감이 풍년이다.
우람한 고모령 자세히 보시라고 사진 많이 올리니 열심히 보이소!! 저 고개를 넘어가면 옛 '파크호텔'
지금의 '인터불고 호텔'이 나온다
'비내리는 고모령'이니 비오는 퇴근길에 거꾸로 차를 돌려서 한 컷 했심다!! 분위기 좋으라고~~
넘어와서 뒤를 쳐다보니 고모령이 저 멀리 보인다. 우측은 동대구역 진입구역, 철도공사 재산이 어마 어마 한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좌측은 인터불고 호텔 인도어 골프 연습장
위 사진의 야경
인터불고 호텔 정문 앞, 앞으로 보이는 것이 옛 파크호텔이고 지금은 별관으로 사용하는 듯 함.
외국인 카지노가 영업을 하고 있는데 정문 우측에 빨간 글씨로 카지노가 보이지예?? 일본사람들에게 알려 주이소!!
별관 야경
호텔 본관이다. 그런데 내가 굳이 이 호텔과 무슨 연관이 있다고 본관, 별관, 심지어 야경까지 포스팅하느냐?? 커피라도 한 잔 얻어 마셨느냐?? 다시 말하지만 그런 일 절대 없다.
내가 이미 이분에 대해서는 언제인가 포스팅 한 것이 있지만, 다시 설명하고자 한다.
왜냐? 내가 보기엔 그분은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훌륭한 분이기 때문이다.
먼저 "인터불고(Inter - Burgo)"의 어원이 궁금한데, 이것은 스페인어로 "모두의 마음과 뜻을 함께하는 화목한 마을"이란 뜻이라고 하며,
왜 영어를 두고 스페인어냐? 라고 궁금하겠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주인장인 "권영호" 회장님이 스페인 교민이기 때문이다.
이 호텔은 2001년 개관이 되었고, 대구 최초로 특1급 호텔로 지정되었으며, 스페인에 소재한
모기업 (주)인터불고 그룹의 계열사이다. 인터불고 그룹은 수산, 냉장, 관광, 유통, 조선, 조경
그리고 장학재단을 운영한다.
나도 권영호님을 직접 본 적이 없다. 텔레비젼에서 두 번 본 것이 전부인데, 참으로 소박하고, 수수한
부자라는 생각을 하였다. 지금도 한국에 오면 프라이드를 타고, 한 달 생활비로 400만 원을 사용하며
우리네 일반 봉급쟁이처럼 돈이 더 필요하면 부인에게 부탁하여 타서 쓴다.
자기 호텔에 있는 커피숍을 이용할 때도 반드시 비용을 지급하고 마시고, 매사에 공사가 분명한 분이다. 그분은 원래 원양어선 기관장출신이라고 얘기를 들었다. 스페인령 라스팔마스에서 원양어선을
가지고 사업을 일으켜서 지금의 그룹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분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국민정부 시절에 청와대에서 기업인들을 초청하였는데
이분도 초청되어서 청와대에 직접 자가용을 몰고 정문 앞에 가서 들어가려고 하였단다.
그런데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다는데, 왜 그랬을까? 이유는 자가용 때문이었다.
명색이 그룹회장인 사람이 15년 정도 된 고물 현대 엑셀(1,500cc)을 손수 몰고서 청와대에
짠~~ 하고 나타났으니~ 경비하는 친구들이 그런 것을 언제 본 적이 있어야지~~ ㅋ~
돈이 많아도 돈자랑 않고 묵묵히 장학재단을 만들어 가난한 학생들을 돕고 있으니
당연히 이곳에 포스팅되고, 설령 호텔 광고가 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전혀없다.
* 영(嶺)
지형상 산줄기가 낮아져 안부(鞍部 :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우묵한 곳)를 이루는 부분. 영은 단층선을 따라 발달하거나, 습곡작용을 받아 낮아진 곳에 이루어지거나, 또는 암석의 차별침식의 결과에 의하여 침식을 많이 받은 부분에 발달한다.
영에 대한 명칭은 현(峴)·치(峙)·점(岾)·항(項) 등의 한자 용어와 고개·재·목·퇴·티 등 순수한 우리말 용어가 많다. 여러 가지 용어 가운데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영’이며, 차령(車嶺)·마천령(摩天嶺)처럼 산맥의 이름을 대표하는 경우도 많다.
‘치’는 고개·재 등과 같은 의미로 통하는데, 관북지방과 영남지방에 이러한 지명이 많이 분포한다. 치 자체가 고개를 의미하므로 영남지방에는 울치(蔚峙)·율치(栗峙) 등 하나의 접미어로 이루어진 지명이 분포한다.
그에 비해 관북 지방에는 후치령(厚峙嶺)·주치령(走峙嶺) 등 고개를 의미하는 용어가 중복되는 경우가 많다. ‘점’은 현재 거의 소멸된 지명으로 문경새재의 옛 한자식 지명이 초점(草岾), 즉 ‘억새풀고개’였다는 사실을 일부 주민들만이 기억하고 있다.
항은 안부를 의미하는 말로서, 그리 높지 않은 고개에 많이 붙여진다. 영은 일반적으로 분수계(分水界)를 이루며, 영의 양쪽에는 낮은 골짜기가 길게 발달한다. 따라서 예로부터 이러한 골짜기와 안부를 연결하는 교통로가 발달하였다. 영로(嶺路)의 발달은 해발고도, 경사도, 영로의 길이·위치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알프스 산지의 몽스니(Mont Cenis)·상 베르나르(St. Bernard)·상 고트하르트(St. Gothard)·심플론(Simplon)·브레네르(Brenner) 등은 유럽 대륙의 북부 지방과 남부 지방을 연결해 주는 고개들이다.
인도 북부의 카이버(Khyber)고개는 중앙아시아와 인도반도 사이의 주요 통로로서, 고대로부터 민족의 이동과 문화전파의 요지였다.
한반도에는 높은 산지의 대부분이 북동부에 분포하기 때문에 척량산맥인 낭림산맥과 태백산맥, 그리고 개마고원 일대에는 높은 고개들이 분포하며, 서남부 지방에는 대부분 낮은 고개들이 분포한다.
개마고원은 평안북도 동부 지방으로부터 두만강 상류 지방에 이르는 광대하고 높은 고원인데, 해발 1,500m가 넘는 낭림산맥을 경계로 하여 동개마고원과 서개마고원으로 나뉜다.
낭림산맥에는 아득령(牙得嶺, 1,479m)과 검산령(劍山嶺, 1,127m) 등 높은 고개가 있어 양 지역 간의 교통로로 이용된다. 서개마고원에는 강계(江界)와 자성(慈城) 간의 신원령(新院嶺, 1,011m), 강계와 희천(熙川) 간의 적유령(狄踰嶺, 969m), 덕천(德川)과 희천 간의 사일령(社日嶺, 467m) 등이 발달하였다.
동개마고원의 남쪽 가장자리를 따라 발달한 함경산맥(咸鏡山脈)은 동해안까지 접근하기 때문에 해안지방으로부터 내륙지방으로 접근할 수 있는 통로는 드문 편이다. 대표적인 고개는 부전령(赴戰嶺, 1,445m)·황초령(黃草嶺, 1,290m)·후치령(厚峙嶺, 1,335m)·함관령(咸關嶺, 1,837m) 등이다.
함경남도와 함경북도의 경계가 되는 마천령산맥에는 남설령(南雪嶺, 2,150m)·마천령(873m)·허항령(虛項嶺) 등 높은 고개가 있다. 남설령 부근에는 길주(吉州)와 혜산(惠山) 간의 철도가 놓여 있다.
요동 방향 산맥에 속하는 관서 지방의 산맥들은 높은 낭림산맥에서 갈라져 서쪽으로 갈수록 점점 맥세가 약해지고 고도가 낮아질 뿐만 아니라 안부에 의하여 끊어진다. 관서지방의 대표적인 고개는 멸악산맥에 있는 자비령(慈悲嶺)이다.
별로 높지도 않은 이 고개가 유명한 이유는 서울과 의주 간의 간선도로상 가장 중요한 전략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곳에는 관방(關防)을 설치하여 외적 침입을 막아왔다.
고려 후기 무신 집정 시기에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은 서경병을 이끌고 내려오다가 자비령의 절령관(?嶺關)에서 관군에게 패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한 바 있다. 1269년(원종 10)에 최탄(崔坦)의 일파가 서북면에서 난을 일으켜 자비령 이북의 60여 개 성을 원 세조(世祖)에게 바쳤다.
이곳에 동녕부(東寧府)를 설치한 원나라는 1290년까지 자비령을 고려와의 국경으로 삼았다. 1361년(공민왕 10)에 반성(潘城) 등이 이끄는 10여만 명의 홍건적 침입시 자비령의 방어선이 붕괴됨에 따라 개경이 함락되고 왕은 안동(安東)으로 몽진하였다.
태백산맥은 한반도의 동쪽에 치우친 척량산맥으로서, 함경남도와 강원도의 경계가 되는 황룡산(黃龍山, 1,268m)에서 시작하여 부산의 다대포(多大浦)까지 연속되는 긴 산맥이다. 태백산맥의 북부에는 1,000m 이상 고산준령이 줄을 이었으며, 영남지방에 속하는 남부에서는 평균고도 800m 정도를 유지한다.
태백산맥은 동해안 쪽이 급경사를 이루고 영서지방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경동지괴(傾動地塊)를 이루고 있다. 지형적인 장애로 인하여 영서지방과 영동지방 간의 교류가 제약을 받았으므로 영동 지방은 문화적으로 고립되어왔다.
그러나 추가령(楸哥嶺, 752m)·철령(鐵嶺, 685m)·도납령(道納嶺, 661m)·기대령(旗垈嶺, 824m)·추지령(秋地嶺, 645m)·단발령(斷髮嶺, 824m)·내무재령(內務在嶺)·진부령(陳富嶺, 529m)·대간령(大間嶺, 647m)·미시령(彌矢嶺)·한계령(寒溪嶺, 935m)·선자령(仙子嶺, 1,297m)·대관령(大關嶺, 862m)·임계령(臨溪嶺)·죽치(竹峙)·울치(蔚峙)·성법령(省法嶺)·추령(秋嶺) 등 안부가 발달하여 동서 교통로로 이용된다.
태백산맥의 동쪽 지방을 영동(嶺東)이라 하고, 서쪽 지방을 영서(嶺西)라 부르는 것은 대관령을 기준으로 삼고 붙인 지명이다. 그만큼 대관령은 태백산맥에서 가장 교통량이 많고 중요한 고개였다.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된 뒤 대관령의 교통량은 급증하였으며, 동해고속도로의 건설과 설악산국립공원 개발을 계기로 강릉에 수렴되는 영동지방의 교통량이 모두 대관령으로 통하고 있다.
철령은 대관령과 함께 조선 시대에 중요한 교통로였다. 이 고개는 서울-철원-회양-안변-함흥으로 연결되는 북로(北路)상의 요지였으나, 경원선(京元線) 개통 이후 추가령의 비중이 높아짐으로써 교통량이 감소하였다. 설악산국립공원 개발에 따라 1970년대부터 중요성이 높아진 고개는 한계령이다.
영서 지방 북부의 인제와 영동 지방 북부의 양양을 연결하는 이 고개는 관광객의 수송, 수산물 운송, 문화교류 외에도 전략적인 면으로 볼 때 대관령 다음으로 중요한 고개이다. 태백산맥은 경상도 지방에 들어와 높이가 현저하게 낮아지고 안부에 의하여 그 맥이 끊어져 산괴(山塊 : 산줄기에서 떨어져 있는 산의 덩어리)로 분리된다.
특히, 영천과 안강(安康), 건천과 경주, 언양과 양산 사이의 고개들은 고도가 100m 정도에 지나지 않으므로 도로의 경사가 극히 완만하다.
소백산맥은 주맥이 1,000∼1,500m의 고도를 유지하는 연속된 산지인데, 태백산맥에서 갈라지는 부분으로부터 속리산까지 서쪽으로 뻗어 있고 1,000m 이상의 높은 봉우리들이 연속된다. 그러나 속리산에서부터 산맥이 남쪽으로 방향이 바뀌면서 추풍령(秋風嶺, 200m)까지 고도가 낮아진다.
추풍령 아래에서 갑자기 고도가 높아지는 소백산맥은 황학산(黃鶴山, 1,111m), 덕유산(德裕山, 1,594m), 지리산(智異山, 1,915m) 등 고봉들을 가지고 있다. 소백산맥은 고려 시대 이래로 한반도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 구실을 해온 중부지방과 인구가 많고 자원이 풍부하였던 영남지방의 경계가 되어왔다.
이 산맥에는 고대로부터 죽령(竹嶺, 689m)·계립령(?立嶺)·새재(641m) 등의 교통로가 열렸는데, 영남지방이라는 말은 새재 즉 조령의 남쪽 땅이라는 뜻에서 연유한다.
소백산맥의 주요 영로는 죽령·새재 외에 모래재·버티재·저수재·벌재·여우고개·이화령(梨花嶺, 548m)·소리터고개·오로재·율치·추풍령·우두령·주치령·지경령·월암령·육십령(六十嶺, 734m)·매치·팔량치(八良峙, 513m) 등이 있다.
≪택리지 擇里志≫에서 이중환(李重煥)은 죽령·새재·육십령·팔량치 등을 대령(大嶺)이라 하고, 그 나머지 고개들을 소령(小嶺)이라 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교통량을 참고한 분류일 것이다.
소백산맥의 영로 중에 가장 역사가 오랜 것은 계립령과 죽령이다. 삼국 시대 초(156∼158년)에 개척된 이 영로들은 고려 시대까지 활발하게 이용되었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 계립령 왼쪽의 새재를 개발하여 공로(公路)로 이용함에 따라 계립령의 기능은 점차 쇠퇴하였다.
근대 교통 기관의 도입 이후 추풍령으로 경부선철도와 경부고속도로가 통하게 됨에 따라 영남지방과 중부지방 간의 교통로 축은 새재의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1911∼1915년 도로 개수 사업으로 새재 이웃의 이화령이 자동차 도로로 개발되었다.
그 밖에 죽령·화령(청주∼상주)·팔량치(남원∼함양) 등이 확장되었다. 새재를 비롯한 영로들은 국지적으로 이용되는 소로로서 명맥이 유지되거나 또는 폐도화하였다. 차령산맥은 태백산맥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경기도와 충청북도의 경계를 이루며, 충청남도 지방의 가운데를 가로질러 서해 바다까지 이른다.
이 산맥은 대체로 고도가 낮은 편이나 남북을 연결하는 교통로상의 장벽이 되어왔다. 차령산맥의 대표적인 고개는 충주와 제천 간의 박달재, 장호원과 충주 간의 임오치, 안성과 병천 간의 부수문이고개, 천안과 공주 간의 차령(253m), 공주와 청양 간의 한치 등이다.
영남지방 안에는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지맥들이 동서 방향으로 뻗어 팔공산·가양산·가지산 등 1,000m가 넘는 봉우리들이 분포한다. 그러나 이러한 산지에는 도처에 안부가 발달하여 높은 산들이 고립된 산괴를 이루고 있다.
영남지방에서 교통로를 열기 쉬운 유명한 안부로는 대구분지 북쪽의 소야고개, 대구와 청도 사이의 팔조령(八助嶺, 373m), 영천과 청도 간의 성현(省峴), 삼랑진과 물금 사이의 작천도(鵲遷道) 등이다.
노령산맥은 고도가 그리 높지 않으나 호남평야와 나주평야 등 저평한 지역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양 지역 사이의 교통 장애가 되었다. 노령산맥의 갈재(276m)는 호남선과 호남고속도로가 통하는 요지이다. 높고 험준한 고개가 아니면서도 널리 알려진 것들이 서울 주변에 많이 분포한다.
이러한 고개들은 서울 시가지의 발달에 장애가 되어왔는데, 널리 알려진 고개로는 무악재·아현·미아리고개 등이 있다.
시외로 나가면 경원국도상의 축석령(123m), 경의국도상의 혜음령(惠陰嶺), 경춘간의 망우리고개, 과천 방향의 남태령, 경부고속도로 양재 톨게이트 남쪽의 다리내고개 등이 유명하다.
혜음령은 조선 시대 서로(西路)의 요지로서 고개마루에는 벽제관(碧蹄關)을 설치하였던 곳이며, 다리내고개는 영남대로상의 요지였으나 한동안 폐도가 되었다가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이용도가 높아졌다.
높은 산지의 허리 부분에 놓여 있는 영은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거나, 또는 그 일대에서 가장 편리한 통로이므로 평야 지역의 모든 교통로가 영의 입구에 수렴된다.
이와 같이 교통로가 결절(結節)하는 장소에는 관문취락(關門聚落)이 발달하는데, 이 취락들은 상이한 두 가지의 지형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정치·경제·교통·문화적으로 복합적 기능을 가진다.
그리고 이 취락은 일반적으로 그 지역의 수위도시(首位都市)로 발전한다. 영을 배경으로 발달하는 관문취락으로는 대관령 동쪽의 강릉, 새재 북쪽의 충주와 남쪽의 상주 또는 점촌 등을 들 수 있다.
관문취락보다 규모가 작은 경우에는 영하취락(嶺下聚落)이라고 부르는데, 대관령 서쪽의 하진부, 죽령 일대의 단양과 풍기, 새재 일대의 수안보와 문경 등이 그것으로 모두 영을 배경으로 발달하였다.
영은 일반적으로 지역 또는 국가 간의 경계가 되기 때문에 예로부터 정치·군사적으로 중요시되었다. 따라서 영로상의 요지에는 성(城) 또는 책(柵) 등 관방을 설치하였다. 관방에는 관문을 만들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며, 동시에 통행자를 검색하였다.
이러한 관방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 죽령·계립령·새재·관갑천(串甲遷)·소야고개·작천·자비령·철령·혜음령 등이 있다. 계립령과 죽령은 각각 신라 아달라왕 3년(156)과 5년(158)에 개통된 영로이다. 당시 신라의 판도는 아직 소백산맥에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이 영로가 과연 신라인에 의하여 개척되었는지 의문시되는 점이 많다.
따라서, 이 영로를 개척한 사람들은 남한강 상류 지방에 거주하다가 신라에 합류한 옛 진한계(辰韓系)라는 견해를 조심스럽게 피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 영로는 5세기 말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이 되었으며, 옛 국경의 경관이 현재도 남아 있다.
문경새재의 관방이 유명해진 것은 임진왜란 때문이다. 임진왜란 직후 조정에서는 유성룡(柳成龍)의 주청에 따라 새재 어뢰동에 목책을 두르고 군사를 배치하였다. 숙종대에 이르러 주흘관(主屹關)·조곡관(鳥谷關)·조령관(鳥嶺關) 등 3개의 관문을 설치하였다.
동시에 문경읍 남쪽 20여 리 지점의 관갑천 잔도를 방어하기 위하여 고모산성(姑母山城)을 보수하였다. 대구의 북쪽 소야고개에는 제2방어선을 두어 칠곡의 가산성(架山城)을 쌓았으며, 물금(勿禁)과 삼랑진 사이의 작천잔도(鵲遷棧道)에 작원관(鵲院關)을 설치하여 왜의 침입을 대비하는 제1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러한 관문에는 대개 기찰(譏察)이 배치되어 통행자를 검색하였다. 새재의 관문, 작원관 등과 유사한 기능을 가졌던 곳은 혜음령의 벽제관, 자비령의 절령관이다. 이 관방들은 대륙으로부터의 침입에 대비하여 설치되었다.
경제적 측면에서 본 영의 기능은 전략적인 면에 비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고대로부터 영로 부근에는 각지의 상인이 집결되어 상업 요지로 발달된 취락이 많은데, 영서지방의 대화·횡성, 죽령 일대의 풍기, 새재 일대의 충주·점촌, 화령 일대의 보은·상주, 추풍령 밑의 김천 등이 좋은 예이다.
이러한 지역에서는 해안 지방의 어염(魚鹽), 산지의 임산물, 평야 지대의 곡물과 가축이 교역된다. 영은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중요시된다. 일반적으로 산맥은 방언·가옥 구조·생활양식 등 문화권 설정에 있어서 자연적인 경계를 이룬다.
그러나 영로는 이러한 제약을 완화시켜주는 통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산맥에 의하여 갈라지는 양 지역 간의 문화교류를 촉진시키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죽령 북쪽의 단양과 남쪽의 풍기, 화령 동쪽의 상주와 서쪽의 보은, 팔량치 동쪽의 함양과 서쪽의 운봉은 예로부터 혼인 관계, 주민의 이동, 기술과 정보의 교환 등 문화교류를 통하여 문화적 동질성을 유지하여 왔다. 산맥은 지역 간의 자연적인 방벽을 이루기 때문에 가장 이상적인 정치적 또는 행정적 경계로 이용된다.
그러나 산맥을 가로지르는 영은 산맥의 양편에 있는 주민들을 정치·경제·문화적으로 연결시켜 주는 통로 구실을 한다. 그러나 터널이 생겨나 영밑을 직선으로 굴착, 관통하는 산업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영의 기능은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三韓의 國家形成」(千寬宇, 『韓國學報』2, 一志社, 1976)
「嶺南路의 景觀變化」(崔永俊 -大韓地理學會, 『地理學』28, 1983)
「路邊聚落」(崔永俊 -서울大學校地理學科, 『地理學論叢』11, 1984)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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